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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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9:32 판
By John Piper
About The Love of God
Part of the series Romans: The Greatest Letter Ever Written
Translation by Desiring God
로마서 8:28-32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어떤 진리는 말문을 닫게 만듭니다. 로마서 8:28-80에서 바울은 거의 말문이 닫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분을 미리 아셨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을 향하여 미리 정하셨으며, 죄와 허물로 죽어 있을 때 부르셨으며, 오직 믿음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써 값없이 의롭다 하셨으며, 이제 다시 오실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여러분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체와 같은 몸을 입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합니다. 거의 그렇습니다. 그는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합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말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위대한 일들에 적합한 표현은 찾기 어렵다"는 것이 그 한 가지요, "이 위대한 일들을 표현하기 위한 말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바울이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할 때, 그의 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다시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다른 말로 이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는 줄곧 렇게 말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만 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을 자녀, 부모, 혹은 친구에게 여러 번 나누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다시 말하되 다른 방식으로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다른 이메일을 써야 하며, 또 다른 편지를 써야 하며, 또 다른 교훈을 가르쳐야 하며, 또 다른 메모를 메모판에 붙여 놓아야 하며, 또 다른 시를 써야 하며, 또 다른 노래를 노래해야 하며,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또 다른 말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우리는 그것들을 다른 방법으로 말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거듭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영광을 또 다른 방식으로 진술하는 것은 언제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목차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바울은 31절에서 어떻게 말하나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는 이미 앞에서 말했었던 것을 다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대적하리요.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를 미리 아셨으며, 아들이 되게 미리 정하셨으며, 죽음에서 우리를 부르셨으며,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기쁜 날까지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오!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씀은 얼마나 소중한 말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거스리신다"는 말은 가장 두려운 말입니다. 무한히 강력한 진노가 우리를 대적한다면, 차라리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달콤한 은혜의 선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심판에 의하여 영혼이 소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부인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들의 주장은 과녁에서 멀리 빗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소멸되는 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출이자 구조입니다(요한계시록 6:16을 보십시오). 절대로 절대로 어떠한 인간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든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신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는 우리 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하나님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시며, 결코 우리를 적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질병은 결코 정죄하는 심판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통사고가 나든지 가전제품이 고장나는 경우도 하나님의 벌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의 어려움도 결코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직하는 것도 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말 안 듣는 아이들도 결코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사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며, 우리를 대적하시지 않습니다. 형통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다른 말로 하자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31절에 머물러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울이 이 질문을 할 때 그가 예상한 답은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 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35절에 의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등의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습니다. 3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는 무슨 뜻일까요? 제 생각에, 이는 아무도 성공적으로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귀와 악한 사람들은 우리를 아프게 만들 수도 있고, 우리의 차를 훔쳐 갈 수도 있고, 결혼 생활에 갈등의 씨앗을 뿌릴 수도 있고, 직장을 빼앗을 수도 있고, 아이를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면, 적의 의도는 전복되고 여러분을 대적하고자 하는 적의 목적은 뒤집어져서, 반대로 그리스도를 높이고, 영혼을 거룩하게 하고, 믿음을 깊게 하는 유익을 가져다 주게 될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결국 유익을 낳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신다면, 이 일들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적들이 악을 꾀할 때, 하나님은 선을 계획하십니다 (창세기 50:20, 45:7). 여러분을 대적하는 것들이 여러분을 위하도록 하나님은 만드십니다. 아무도 성공적으로 여러분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 삶 속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쳐야 마땅한지요! 우리는 세상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질병과 도난맞는 것과 테러와 실직과 기타 수많은 것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양식을 그에 맞게 선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이방인들은 이것들을 구하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6:32-33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과 희생과 고난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하는 도중에 잃거나 부족하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선을 위하여 역사할 것이고 여러분에게 백 배나 되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따라서 기니의 칸칸에서든, 터키의 이스탄불에서든, 인도네시아의 터네이트에서든, 미네소타의 미네아폴리스에서든, 여러분의 적 앞에 서서 복음을 말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너는 너의 할 일을 하거라. 하지만, 결국 네가 하는 모든 말과 네가 가하는 모든 상해는 단지 나의 믿음을 정련할 뿐이며, 나의 상급을 크게 할 것이며, 나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낙원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얼마나 달리지게 되는지요.
천국의 견고한 논리
그러면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리요?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무슨 말을 더하였나요? 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합니다. 이제 32절처럼 말하길, 아무도 성공적으로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고 약속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흘러넘치는, 끝없이 계속되는 관대한 은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관대한 은혜는 죄인을 위한 그의 아들의 죽음 안에 반석같은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저는 이를 "천국의 견고한 논리"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논리는 더 큰 것에서 더 작은 것을 끌어내는 논증입니다.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을 끌어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에서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장애물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 이것은 더 큰 것이고, 더 어려운 것이고, 우리 구원에 있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 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고문과 조롱과 죄를 담당하는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이 일을 하셨다면, 더 작은 것, 더 쉬운 것은 틀림 없이 해 주실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로 사신 모든 것–만물–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실 것입니다.
그의 아들
위 말씀의 각 부분들을 나누어 세밀히 살펴봅시다. 먼저, "그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찾아내서 그의 아들로 입양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재하시고, 실로 영원히 존재하시고, 성부와 함께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분으로서 아버지의 신적 형상이십니다(골로새서 2:9). 로마서 8:3로부터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다시 말하면, 아들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기 전에 존재하셨습니다. 이분은 선지자에 불과한 분이 아닙니다. 이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32절에서 "자기(His own)" 아들이라고 부를 때, 이 말씀의 뜻은 다른 이는 없고 그는 아버지에게 무한히 소중하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적어도 두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태복음 3:7, 17:5). 골로새서 1:13에서 바울은 그를 "사랑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농부와 포도원 비유를 봅시다. 포도원 소출을 받으러 보낸 주인의 하인들은 얻어맞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마가복음 12:6) 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에게는 한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깊이 사랑받는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를 보내셨습니다.
저는 아들 넷이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같은 사랑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제 딸을 사랑합니다. 제 아버지와 제 동료 스태프들도 사랑하고 여러분도 사랑합니다.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의 뜻인즉, 그 사랑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랑도 사랑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직 이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같은 사랑은 없습니다.
32절의 핵심은 독생자를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와 우리 구원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장애물, 마치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거대한 장애물입니다. 여기 거의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과의 유대(bond)를 너무나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고 아들을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배신과, 조롱과, 채찍질과, 침뱉음과, 고문과, 십자가에 못박힘과, 칼로 옆구리를 찔림에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진정 사랑의 아들을 내어주고자 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목적은 결코 멈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장애도 극복되었다면, 그밖에 어떤 장애가 극복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큰 장애를 극복하고 사랑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까? 바울의 대답은 예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진술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고통과 수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렇게 취급당하시는 것은 무한히 끔찍한 일입니다. 죄는 그 시간에 최악의 지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모든 죄– 우리의 죄 –는 하나님에 대한 공격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의 권리와 그의 진리와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러한 취급을 받으시게 내어주셨습니다.
내어주심
대신에 "그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주 안의 거의 모든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여기 이 순간에 만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신적 사랑과 죄에 대한 신적 미움이 여기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신적 주권과 영원한 무게의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여기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무한한 신적 지혜와 능력이 여기서 만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그 때 그 순간에 말입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가복음 3:19).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마가복음 15:15), 헤롯과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이 그를 넘겨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4:27, 28). 예수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구절도 있습니다(요한복음 10:17, 19:30). 하지만 바울은 여기 32절에서 궁극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구원의 안과 뒤와 아래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계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사동행전 2:23). 가룟 유다와 빌라도와 헤롯과 이스라엘 군중들과 이방인 군사들과 우리의 죄와 예수님의 양같은 복종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슨 말 하리요?
이에 대하여 무슨 말 하리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천국의 논리가 서는도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마저 내어주셨다면...... 그렇다면 그는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실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그 어떤 좋은 것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는 시편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라는 말씀의 결정적인 성취입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3:21-23,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라는 말씀의 약속이자 근거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라는 말씀의 약속을 인친 것입니다. 이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1-33)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셨다면, 그는 우리에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모든 것이라고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8:35)? 그 답은 350년 전 존 플라벨이 한 장엄한 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이 영적인 것이든 이 땅에서 필요로 하는 일시적인 것이든 그의 백성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유효하게 부르시고, 값없이 의롭다 하시고, 완전히 성화시키시고, 영원히 영화시키시지 않을 수 있나요?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입히시지 않고, 먹이시지 않고, 보호하고 구출하시지 않을 수 있나요? 확실히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매맞음과 눈물과 신음과 한숨과 비참함을 겪게 하셨다면, 그 후 그의 백성들에게 어떤 긍휼이든, 어떤 위로이든, 어떤 특권이든,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이 땅의 필요이든,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당신을 위하여 주셨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단순히 그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두려움 속에서 살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