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최고위에 대한 열정,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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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Piper About Christian Hedonism
Part of the series Passion 97

Translation by Sung E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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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Passion) 97*

패션 ‘97에 온 이유들

이유 #1

내가 여기에 온 몇가지 이유을 얘기하면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한 지방 교회에서 16-17년 동안 목사로 지내는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는 수개월과 수년에 걸치면서 교회의 비전과 목사의 비전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일년전 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전 성명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모든 것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최고위에 대한 열정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한다.

어떠한 망설임 없이 이것이 나의 삶의 사명이자 베들레헴 침례교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초대를 받고, 이 모임에 대해 읽어보면서 “열정(passion)” 이라는 단어를 보고, 또 이사야서 26:8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속의 진리를 보았을때—나는 푹 빠졌 버렸습니다.
당신 모두와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모든 것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최고위에 대한 열정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지금 여기에 선 첫번째 이유입니다.

이유 #2

둘째로, 내가 당신의 기쁨의 불을 일으키는 작은 성냥이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감동받고 행복하게 이 장소를 떠나기를 바랍니다.

이유 #3

그리고 세번째 이유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첫번째 이유와 두번째 이유가 같은 이유라는 것을 당신에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의 최고위를 향한 열정을 전파하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기뻐 하는 것은 거의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때, 당신 속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고 두고 반복할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 안에서 가장 만족할때, 당신 속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불러오던 노래들이나 표현해 오던 갈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들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 많은 만족을 찾을 수록, 우리가 그분으로 부터 더 깊에 마시고 그분 되신 연회상에서 더욱 많이 먹을 수록, 더욱 더 그의 가치과 그의 모든 것을 충족하심이 확대하여 보여집니다. 그래서 경쟁이 없습니다—놀라운 일이죠. ’68, ’69, 그리고 ’70 년에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역사 하셨을때 깨달은 이것이 나에게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받기를 위한 열정과 당신의 만족되기를 원하는 열정 사이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에 온 세번째 이유를 다르게 표현 할 수 있습니다:나는 빙하에 횃불을 들이 대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나온 겁니다. 마태복음 24:12에, 말세를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람이 식어지리라” 하셨습니다. 나는 냉담해지는 것이 죽을 정도로 두렵습니다. 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어느날 말라 버린다든지 꽁꽁 얼어버린다는 생각조차 혐오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전세계에 걸쳐 빙하처럼 다가 오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나의 예상 중 일부는 불법이 성하여 지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황량한 종말의 묘사가 되겠죠.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을 계속 읽어나가면, 아래 13절에, 말하기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누군가는 견딜 것입니다. 그 다음 절에 말하기를, “이 천국 복음- 바꿔 말해서, 왕되신 예수의 최고위에 대한 열정을 전파하는 그 복음- 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제 12절을 14절과 나란히 놓고 긴장감이 느껴지는지 보십시요. “불법이 성행할 것이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이 천국 복음—예수의 주권 통치의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고, 그리고 나서야 끝이 오리라.”

이 두 구절 사이에 긴장감이 있습니다. 내가 긴장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차가운 사람들이 당신의 학교 교정으로 복음을 들고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사람들은 차가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걸 아냐구요? 몇 구절만 뒤짚어 보면, 9절에, 굉장히 다른 예언적인 말에서 당신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르기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예수님은 말씀 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만약 우리가 선교하는 가운데 권력자들에게 넘겨진다면, 만약 우리가 죽임을 당한다면, 만약 우리가 우리가 가는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면—난 한가지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되신 예수님의 굉장히 뜨거운 예배자들이 그것을 해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 9-14절에서 보는 바와같이 종말이 가까움에 따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얼음처럼 차가워 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굉장히 뜨거워서 예수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내려 놓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의 목회를 하는 것이나 여기에 온 것은 빙하에 횃불을 들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설교를 한적이 있었는데, 한 6살이나 7살 정도 된 어린 소녀가 예배 후에 내게 다가 왔습니다—저는 우리 교회 어린이들에게 제 설교를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권장합니다— 그 소녀가 “이게 제가 본거예요” 하더군요. 그 소녀는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라고 쓰인 거대한 빙하를 그렸습니다; 또 한 마른 사람이 횃불을 들고 있었고 빙하의 꼭대기엔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위에는 햇볕이 한가득 그 구멍을 통해 내리 쬐고 있었습니다.

이제, 내 종말론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당신의 학교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또는 오스틴(Austin),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 또는 당신의 출신지가 어디든 간에 그곳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합니까: 빙하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차가워 지고 있습니다-말라버리고, 꽁꽁 얼어 버리죠—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종말에 대해서 말할때, “베들레헴 침례교회”, 혹은 “미네아폴리스”, 또는 “오스틴에 있는 택사스 대학”이 그 빙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혀!! 만약 빙하에 불을 녹이는 하나님을 위한 굉장히 뜨거운 횃불을 든 충분한 사람들이 있다면, 커다란 구멍이 당신의 학교와 교회와 심지어는 당신의 도시 위에 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에 온 이유입니다. 나의 횃불을 들어 올리고 싶습니다.

100여년 전에 영국의 스퍼젼(Spurgeon)은 메트로 폴리탄 성전(Metropolitan Tabernacle)에서 설교하면서, “ 사람들은 내가 태우는 것을 보러 옵니다.” 라고 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꺼질 것 같은 그들의 작은 횃불을 들고 와 내 횃불에 가져다 대고는 나가서 또 한 주 동안 예수를 위해서 테웁니다. 당신이 오늘 아침 깜박거리는 횃불을 여기로 들고 와서 내 불에 가져다 댄다면 나는 너무도 감격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여기에 온 이유 입니다.

이 말씀의 목적: 기반 설립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위한 기반이 있습니다. 나의 과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정을 가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에 걸쳐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오늘 아침과 내일 아침. 오늘 아침은 토대이고 내일은 그 적용입니다.

토대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최고위를 향한 당신의 열정은 모든것에 있어서의 자신의 최고위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에 바로 기초를 둔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중심적임이—지속되기 위해서는—하나님의 하나님 중심적임에 토대를 두어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길 원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보배가 되기를 원한다면—우리가 여기서 노래했던 것처럼—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고 귀중하게 여기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보배가 하나님 자신인 것과 하나님은 자신을 그 어떤것 보다도 더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기쁨,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 자신으로 부터 빼앗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토대입니다; 이것이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하나님 안에서의 당신의 기쁨 추구에 대해서 그리고 이 추구가 필연적으로 당신의 삶 속에서의 그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추구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영광을 열망하십니다.

짧은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8-9년 전에 모교인 위튼 대학(Wheaton college)에서 강연했습니다. 그 크고, 샹들리에 장식된, 푸른색의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선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영원히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고 했을때, 발코니에 앉아있던 내 친구들 모두는 한결같이, “이런, 졸업20년 후에 모교에 와서 학생들에게 하는 첫 강연에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시작하자 마자 웨스트민스터 문답을 잘못 인용해서 ‘사람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 이라고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 이라고 해버렸군” 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한시름 놓도록, 나는 계속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자신을 영원히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한번도 집에 가져온 주일학교 주보에서 “하나님은 당신 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찮은 당신에게 유일한 희망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길 바라는 것이다.” 라는 글을 본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이런 글을 주일학교 주보에서 본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 베들레헴 침례 교회에서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가정이나 교회에서 우리가 기독교인 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무도 기뻐하고 계신다고 생각하지,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기뻐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자부심을 가장 가치있게 여기는사람 중심적인 이세상에서는 하나님 없이 당신이 어차피 하려 했던 것들을 지지해주는 정도로만 기독교인이 되기가 쉽습니다. 누가 기독교인이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면하지 않고 당신이 사랑하려던 것들을 사랑만 한다면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냄에 열중해 있는 하나님으로 그분의 무한한 영광을 보기 보다 하나님이 그저 당신의 자기 향상과 고양에 쓰이는 도구일 뿐이라면, 당신의 진정 (기독교로) 전향 했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이곳 오스틴(Austin)의 패션(passion) ’97모임에서 있어야 할 중요한 현실 점검 입니다. 거의 아무도 하나님이 나를 그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셨다는 성경 속에서 찾은 이 사실을 나에게 언급하거나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1976년 베델(Bethel) 대학에서 그 당시 “계절학기(Interim)”로 불리던 에베소서 1장에 대한 수업을 가르칠때, 에베소서의 첫 14절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면서 내 세상이 다시 활짝 열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번에 걸쳐--6절, 12절, 그리고 14절에서—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태초에 그 안에 택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미리 정하신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함이다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왜? 그의 영광과 은혜가 찬미되고 크게 확대되기 위해서 입니다. 당신의 구원 받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선택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거듭남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의 의롭다 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당신의 거룩하게 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당신의 성화도 하나님의 영광에 흡수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이사야서 43:6-7절: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 하셨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편 106:7-8

다시 말해서, 홍해를 가르시고 그의 거역하는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그의 권능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저 멀리 떨어진 여리고까지 알려져서 한 기생을 살리고, 그래서 그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나팔을 불려고 할때에 그녀가 새로 거듭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 우리가 너희의 이름과 명성을 들었슴이니라.” 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과 그녀의 가족이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을 믿고 그 파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의 영광을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이스라엘을 용서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나를 거역하였다”, 고 하나님의 말씀을 에스겔은 말합니다. “내가 나의 저주를 퍼부으려 하였으나 나의 이름이 만국에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행하였느니라.” 그리고 나서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서 바벨론으로 보내시고, 70년 후에 그들에게 긍휼를 베푸십니다. 그는 그의 언약된 신부와 이별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다시 데리고 오리라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동기 였을까요?

이사야서 48장을 들어 보십시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풀무 불로 시련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긍휼을 베푼 하나님 중심적인 동기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셨고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얼마나 많이 우리는 요한복음 3:16절을 인용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영광스러운 진실입니다. 오늘 아침 말씀이 끝나기 전에, 적어도 내일 아침에 당신은 지금 말하고 있는 강조된 중점과 아마도 여러분이 오랫동안 알고 있었을 그 중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분이 오셨을까요? 왜 예수님이 오셨을까요? 로마서 15:8절에 따르면 그분은 이 이유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돌아가신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그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오신 주된 이유 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의 영광은 긍휼의 흘러 넘침으로 정점에 달합니다.

로마서 3장에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요: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 그것이 바로 그가 돌아가신 이유입니다. 그분은 다윗의 간음과 살인 같은 죄를 간과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옹호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간과하셔서 다윗이 여전히 왕으로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있습니까? 글쎄요, 하나님의 죄를 간과하심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그의 존재의 깊이까지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다윗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나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단순히 잊고 간과 한 수천명의 성도 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부르짖기를, “어떻게 하나님이신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은 의로우시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은 공정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의 찬양받기 합당하시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오스틴(Austin)에 있는 어느 판사가 그랬다면, 그가 아동 학대자, 강간범, 살인자를 무죄 선고했다면, 그는 당장에 자리에서 물러 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매일 그렇게 합니다, 당신은 어떤 하나님 입니까?”

십자가가 이 거대한 신학적 문제의 해답입니다. 즉,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인 동신에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은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중심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받기 위해 돌아오십니다.

왜 그가 다시 올까요? 여러분, 예수님은 올것입니다. 그가 오십니다. 왜 그가 오시는지 그리고 그가 올때에 당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준비되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9: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여기서 두가지가 보이십니까? 그는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받고 더 크게 보이기 위해 그리고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려고 오십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지금 시작하지 못한다면 그분이 오실때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임은 당신의 뼛속을 밝히고 당신의 지성과 감성에 불을 일으켜 왕되신 예수님 만날 준비를 시켜서 영원토록 그가 당신을 지으신 목적, 즉 그에게 감탄하고 그를 확대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만원경같이 하나님을 확대해야만 합니다.

그분을 확대하십시요, 그러나 현미경 처럼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은 두가지 종류의 확대의 차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하나는 만원경 확대고 다른 하나는 현미경 확대입니다. 하나님을 현미경 확대한다는 것은 신성 모독 입니다. 현미경 처럼 하나님을 확대한다는 것은 아주 조그만 어떤것을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할려고 한다면, 당신은 신성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원경 확대는 렌즈를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창공을 향해 놓고 실제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단순히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만원경의 용도 입니다.

반짝 반짝 작은 별—밤 하늘을 올려다 보면 그것들은 핀 끝같이 보입니다. 실제와는 다르게 보이지요. 그렇다는 걸 알고 있죠? 여러분은 지금 대학생이니까, 그렇죠? 그것들은 큽니다. 사실은 굉장히 크죠. 그리고 그것들은 뜨겁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만원경을 발명하여 그들의 눈으로 들여다 보고, “이것은 지구보다고 크구나, 몇만배 이상이나 지구보다 크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그런 것을 전혀 알길이 없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습니다.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당신의 학교 교정에 만원경 확대하기 위해 존재 합니다. 그것은 아주 큰 부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는 내일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나님 중심적이라면, 어떻게 그분이 사랑일 수 있을까요?

내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집고 넘어갈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 문제가 지금 제기되기 시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이고 그의 하나님 중심적임은 나의 하나님 중심적임에 근거이다 라는 진리를 나는 말했습니다. 그것을 20년 동안 사람들에게 말해 오는데, 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이건 사랑같이 들리지 않아, 왜냐하면 성경은 고린도 전서 13:5절에서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거든. 그런데 지난 15분 동안 당신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쓴다고 말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거나 당신이 거짓말쟁이요.”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찬양을 구하면서 동시에 사랑일 수 있을까에 대해 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C.S. Lewis 를 인용하면

(문제의) 열쇠를C.S. Lewis에게서 찾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모함(Desiring God)을 읽었다면 다음의 인용구를 기억할 겁니다. 루이스(Lewis)는 20대 후반까지 이교도였고 하나님의 허영심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시편을 읽을때마다,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글을 매번 봤고—그는 시편에 영감을 준 기독교의 교리가 무엇이지 알았습니다.—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나를 찬양하라, 나를 찬양하라”라고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늙은 여인이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것 같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시편에의 묵상’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하나님의 C.S. Lewis의 삶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다음의 글을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또는 다른 것에 대한 찬양에 대한 가장 명백한 사실을 이상하게도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칭찬, 인정, 경의를 표 하는것 이라는 점에서 생각했었다. 한번도, 찬양으로부터 동시 다발적으로 흘러 넘치는 모든 기쁨—가끔 수줍음으로 억제되지 않는다면—에 대해서 인지한 적이 없다. 온세상에 찬양의 소리로 울려 퍼진다: 연인들은 그들의 애인을 찬양하고, 독자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산책하는 사람은 시골을, 플레이어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을, 그리고, 날씨, 와인, 음식, 연기자, 말, 대학, 나라, 역사적 인물, 어린이들, 꽃, 산, 드문 우표, 드문 딱정벌래, 심지어는 가끔씩, 정치인이나 학자에 대한 찬양까지. 우리는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찬양하기를 기뻐하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전체적이고 보다 일반적인 어려움은 최고로 소중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있어서는 어리석게도 그 기쁨을 주는 것을 부인하는데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다음이 중심 문장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우리가 즐기는 것을 찬양하는데서 큰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기쁨은 표현되고 나서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서로에게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계속 말하는 것은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쁨은 표현되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다.

자, 나에게는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임과 동시에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자기 찬양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그 무엇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질문에 대한 답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주어야만 할까요? 당신에게 최상의 것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전 우주에서 최상의 것은 하나님 입니다. 만약에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강, 최상의 직업, 최고의 배우자, 최고의 컴퓨터, 최고의 휴가, 최고의 성공을 주고 그 자신을 주지 않는 다면, 그는 당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고 다른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해도 그가 당신을 무한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이라면 나의 낙으로 하나님을 가져야 합니다. 자, Lewis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 자신을 당신으로 하여금 영원히 즐거워 하도록 주셨다고 했고, 기쁨은 찬양으로 표현되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완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는 당신의 기쁨이 찬양을 통해서 완성되는지 안되는지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그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찬양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의 실체 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위해 최상의 것을 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최상의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기쁨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Lewis는 그 기쁨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그 기쁨은 한정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기쁨을 어떤 면에서라고 한정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나를 찬양하라.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나를 찬양하라.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나를 경배하라. 네가 하는 모든 것에서 나의 최고위를 향한 열정을 갖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받기를 원하는 열정과 당신의 기뻐하고 만족되기 위한 열정은 서로 불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은 같이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안에서 가장 만족함을 느낄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자, 이것이 오늘 아침 말씀의 끝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내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얘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바라건데, 내일 다시 와서 내가 이 말씀을 끝내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이 그 안에서 가장 만족함을 느낄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면—그러므로, 당신의 그 안에서의 만족과 그의 당신 안에서의 영광받음 사이에 긴장과 모순됨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삶의 사명은 당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기독교 희락주의 라고 부릅니다. 내일은 그렇게 하는 방법과 왜 그것이 여러분의 관계, 여러분의 학교, 여러분의 찬양, 그리고 여러분의 영원을 변화시키는지에 관해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268 세대(the 268 Generation)이라고도 알려진, 패션 협회(Passion Conferences)는 루이 기글리오(Louie Giglio)가 1997년에 설립한 기독교 협회로 매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영적 각성 모임인 Passion 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은 존 파이퍼(John Piper)가 97년 Passion 모임에서 나눈 말씀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