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 거룩, 거룩, 만군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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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Piper About 영광

Translation by Desiring God


1973년 6월 1일, 찰스 콜슨(역자주: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백악관 특별보좌관으로 일하였었고 후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징역형을 치름. 교도소선교회를 설립하여 활동함)이 그의 친구인 톰 필립스를 방문합니다. 그 때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시기입니다. 친구인 필립스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하자, 콜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평화를 톰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구의 집을 떠날 때, 콜슨은 차 키를 제대로 꽂아 넣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하게 울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날 밤 나는 내 자신의 죄와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워터게이트의 더러운 속임수에만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깊이 자리잡은 죄와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숨어 자리하고 있는 악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나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내 자신이 저항할 수 없게 그의 기다리시는 팔에 안기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고 내 인생의 가장 큰 모험을 시작한 밤입니다. (러빙갓(Loving God), p. 247)

목차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된 찰스 콜슨

지금 들려드린 이야기는 최근 십 년 동안 수백 번은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 너무 많은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교회의 삶 속에서 그의 회심 이야기에만 안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찰스 콜슨은 자신의 회심 경험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1973년에 기꺼이 울며 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부터 수년 후에 자신의 통탄할 만큼 부적절한 하나님께 대한 이해를 기꺼이 회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심한 영적 가뭄 가운데 지내는 도중이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메마름 가운데 있다면, 힘을 내십시오!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이를 통해 삶이 변했습니다.) 한 친구가 콜슨에게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제목의 알씨 스프룰(R.C.Sproul, 역자주: Ligonier Ministries의 설립자로서 개혁주의 신학자) 박사의 동영상 강의 시리즈를 보라고 권했습니다. 다음 내용은 콜슨이 그의 책 러빙갓(Loving God)에 쓴 내용입니다(14-15쪽):

내가 스프룰 박사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은 그가 신학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드렁하였다. 그 당시 나는 생각하기를, 신학은 인간의 필요라는 전쟁터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아탑 안에 갇혀 있는 것이며, 공부할 시간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내 친구의 강권에 의하여 나는 결국 스프룰의 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여섯 번째 강의가 끝나갈 무렵 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에 대한 경외감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었고, 깊이 기도하고 있었다. 내가 믿고 예배하는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얻었을 때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었다.

나의 영적인 가뭄은 끝났으며, 하나님의 위엄을 이렇게 맛보게 된 나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었다.

1973년에 콜슨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모습에 대해 충분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을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었고, "저항할 수 없게" 하나님의 팔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수년 후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신학자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강의한 시리즈를 보면서 그는 무릎을 꿇게 되었으며 그의 말에 따르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 시점부터 계속해서 그는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위엄을 맛보고자 하는 갈망(taste)"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끝없는 갈망(taste)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충분히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된 욥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1). 욥은 신자였습니다. 그것도 매우 독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었습니다. 틀림 없이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틀림 없이 그는 "하나님의 위엄을 맛보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홀연히 그에게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사막같이 메마른 시기를 통과하는 고통과 비참함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욥의 어두움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신의 위엄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40:8-14; 41:10-11)

결국 욥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에 대하여 찰스 콜슨처럼 대답합니다. 그는 말하길,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42:3-6)

거룩하신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 필요한 인내와 소망

이런 은혜로운 일들이 우리 베들레헴 교회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미 존재합니다. 만일 이런 은혜가 저희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사인들을 보지 못했다면, 오래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부흥의 열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를 지속해나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에이. 제이. 고든(A.J. Gordon)은 그의 책 '선교에 있어서의 성령'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윌리엄 케리가 인도에서 그의 첫 번째 회심자에게 세례를 주기까지는 7년의 세월이 걸렸다. 아도니람 저드슨이 버마에서 그의 첫 번째 제자를 얻기까지는 7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로버트 모리슨이 그리스도께 나아온 첫 번째 중국인을 얻기까지도 7년의 수고가 있었다. 로버트 모팟은 아프리카 베추아나 위에 성령의 첫 번째 명백한 역사가 있기까지 7년을 기다렸다고 확언하였다. 헨리 리차즈는 반자 만테카에서 첫 번째 회심자를 얻기까지 콩고에서 7년간 수고했다.

인내, 기도와 수고는 부흥의 열쇠입니다. 하지만 기대와 소망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일심으로 추구한다면 이사야와 욥과 찰스 콜슨에게 일어난 부흥의 경험이 이곳 베들레헴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소망의 사인들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 성도 중 한 분이 제게 한 주 전에 편지한 내용에 의하면,

이곳에서의 사역은 저를 제가 이전에 산의 정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을 지나서 더 광대하고 더 위대하고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그림으로 높이 데려가 주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저의 시각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그의 전능한 위대함으로부터 모든 것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베들레헴 교회에 출석하였던 10개월 동안 제 마음에는 놀라운 부흥이 있었고 불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밝게 더 확실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룩함 가운데 장엄하신 것을 볼 때, 그리고 우리 자신은 불순종하는 먼지 같은 자임을 보게 될 때, 부흥이 일어납니다. 심령의 상함, 회개, 죄 용서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 "하나님의 위엄을 맛보고자 하는 갈망", 그의 거룩하심에 대한 갈망(이를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대한 갈망) 등등,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 그가 본 일곱 가지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6:1-4에서 하나님을 본 사건에 대해 말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 네 절 안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을 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본 것에 대하여 적어도 일곱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웃시야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하나님은 이 우주가 생겨날 때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독을 마셨을 때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플리머스 지역을 다스릴 때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1966년에 토마스 알티저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고 타임지가 이를 커버 기사로 실었을 때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수천억 세대 후에, 그의 실재에 대항하는 모든 하찮은 닥치는 대로의 비판들이 태평양 바다 밑바닥의 BB탄들처럼 잊혀질 때에도 살아 계실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전 세계에는 50년 후에도 그 자리에 있을 국가원수가 없습니다. 세계의 리더십에 있어서의 턴오버는 100%입니다. 간단히 말해 110년 후에는 지구에 100억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며 오늘날 살아 있는 40억명의 사람들은 웃시야 왕처럼 그 때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시작도 없으시고 그러므로 그의 존재하심에 있어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 계셨고 항상 살아 계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십니다.

둘째, 그는 통제하십니다. 모든 것은 그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천국에 대한 광경은 하나님께서 밭을 갈고 계시거나 풀을 베고 계시거나 구두를 닦고 계시거나 리포트를 작성하고 계시거나 트럭에 짐을 싣고 계신 광경이 아닙니다. 천국은 침착함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천국 영역에 대해 어쩔 줄을 몰라 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모든 것이 평화스럽고 그는 통제하고 계십니다.

보좌는 세상을 다스리는 그의 권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삶에 대한 권위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그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 얼마나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인가요! 우리는 지난 달 Reformed Journal에 실린 버지니아 스템 오웬즈(Virginia Stem Owens)의 말 같은 직설적인 말들을 이따금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을 똑바로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행하기를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어떤 것도 하실 수 있습니다. 천벌을 내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천벌을 내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자체에 의하여 천벌은 내려집니다(ipso facto). 하나님의 행하심은 그대로 됩니다. 그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없으면 어떤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를 판단한답시고 설쳐대는 인간들을 포함해서요.

하나님께서 절대적 권위를 갖고 계시다는 진리보다 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에게 위엄에 대한 감각을 가져다 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대법원이시요, 입법기관이시요, 최고 행정수반이십니다. 그의 권위있는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의 권위의 보좌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높이 들려 있습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하나님의 보좌가 다른 어떤 보좌보다 높이 들려 있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으뜸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화할 수 있는 반대 권위는 없습니다. 목적하는 것을 그는 이루십니다.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10).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다니엘 4:35). 하나님의 전능(혹은 주권)의 손에 빠져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거나 그가 우리를 반대하시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의 전능에 대한 무관심은 단지 우리가 주의 전능하심을 사실 그대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는 그의 언약을 지키는 그의 백성에게는 기쁨과 능력으로 가득찬 피난처입니다.

4. 하나님은 빛나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눈부시게 빛나십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여러분은 신부의 드레스가 길게 드리워져서 신부의 발걸음과 바닥을 덮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통로를 가득 채우고 의자와 성가대석을 한 자락으로 다 덮고 있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가요? 하나님의 옷이 천국의 성전 전체에 가득하였다는 것은 그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은 수천 가지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하나의 작은 예를 들자면, 레인저 릭은 깊은 바다에 살면서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여러 종의 물고기들—어떤 물고기는 턱에 램프가 매달려 있고, 어떤 물고기는 발광하는 코를 가지고 있고, 어떤 물고기는 눈 아래에 신호등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한 깊은 물 속에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수천 종의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이들 물고기들은 놀랍게 기묘하고 또한 아름답습니다. 이 물고기들이 왜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단지 열 개 정도 되는 효율적이고 간소화된 물고기 종들만 그곳에 존재하지 않고 그렇게나 많은 종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영광 안에서 풍성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충만은 넘치는 아름다움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이를 생각하고 만드신 주님은 얼마나 더 눈부시게 빛나는 분이실까요!

5. 하나님은 숭배받으십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숭배받으십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이 이상한 날개 여섯의 피조물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에 다시는 나오지 않습니다—적어도 스랍이라는 이름으로는. 이 장엄한 장면과 이 천사 무리들의 능력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날개 달린 통통한 아기들이 주님의 귀 주위를 퍼덕거리며 날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4절에 의하면, 그들 중 하나가 말할 때, 성전의 기초가 흔들렸습니다. 이 천사들은 마치 대통령 수행단 앞에서 편대 주행을 하면서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방음벽을 깨뜨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에는 하찮거나 어리석은 피조물이 없습니다. 오직 장엄한 피조물들만 있습니다.

그리고 포인트는: 그들도 주님을 올려다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주님의 면전에 그들의 발을 노출시킬 만한 가치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위대하고 선하고, 인간의 죄에 의하여 오염되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큰 겸손 가운데 그들의 창조주를 숭배합니다. 어떤 천사는 그 똑똑함과 능력에 의해 사람을 무섭게 합니다. 하지만 천사 그 자신들도 거룩한 두려움과 숭배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숨습니다. 그의 천사들도 견딜 수 없는 그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는 얼마나 더 떨어야 하겠습니까!

6.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거룩"이라는 단어는 언어의 바다에서 우리를 세상의 끝에 이르게 해 주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언어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표현해 줄 수 없습니다. 언어의 한계에 이르면 더 이상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지고, 거기서부터는 광대한 미지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거룩"은 우리를 그 경계로 데려가 줍니다. 거기서부터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궁극적으로 정의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끝마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거룩의 어원적 의미는 아마도 잘라내다 혹은 분리시키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은 일반적(혹은 세속적) 용도에서 잘라낸 것 혹은 분리된 것입니다. 지상의 어떤 물건이나 사람은 그들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때 거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땅(출애굽기 3:5), 거룩한 회중(출애굽기 12:16), 거룩한 안식일(출애굽기 16:23), 거룩한 나라(출애굽기 19:6), 거룩한 옷(출애굽기 28:2), 거룩한 도시(느헤미야 11:1), 거룩한 약속(시편 105:42), 거룩한 사람(베드로후서 1:21), 거룩한 부녀(베드로전서 3:5), 거룩한 성경(디모데후서 3:15), 거룩한 손(디모데전서 2:8), 거룩한 입맞춤(로마서 16:16), 그리고 거룩한 믿음(유다서 20)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일반적인 데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때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하나님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그 선하심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과 유사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독특하십니다. 홀로 독특하시며 피조물들과 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전적으로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분은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혹은 만일 어떤 사람의 거룩함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부터 유래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거룩함을 이끌어내시기 위하여 무엇에게 바쳐져야 합니까? 그 자신 외에는 바쳐질 대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위하여 순응해야 할 더 높은 존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되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이십니다. 출애굽기 3:14에서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성격은 그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어떤 규칙을 지키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법칙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율법을 지키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것이 하나님을 드러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십니다. 다른 모든 것은 파생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거룩하심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세 개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이사야 40: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호세아 11:9,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결국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거룩하십니다. (레위기 19:2과 20:7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사야 5:16의 병렬 구조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의 거룩하심은 그의 전적으로 독특한 신성한 본질입니다. 이것이 그의 어떠하심과 그의 행하심 전체를 결정하며, 이것은 다른 누구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어떠하심—그 누구도 그렇지 아니하며 장래에도 결코 그러하지 않을 어떠하심—입니다. 이것을 그의 위엄, 그의 신성, 그의 위대하심, 극히 값진 진주로서의 그의 가치라고 부르십시오. 결국 언어로 더 표현할 말이 떨어지게 됩니다. "거룩"이라는 단어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끝까지 항해한 것이며, 그곳은 경배와 놀라움과 경외감 가운데 전적인 침묵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하나님께 대해 더 알아갈 많은 것들이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거룩한 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박국 2:20)

7.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십니다

그러나 침묵과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일곱 번째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십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거룩하심의 현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신적 본질의 비할 데 없는 완벽함입니다; 그의 영광은 그 거룩하심의 전시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시다"는 의미하기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공개되었다. 그의 영광은 그의 거룩하심의 비밀의 공개적 계시입니다. 레위기 10:3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보이실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그의 감추어진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계시된 거룩입니다.

스랍들이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말할 때, 이는 천국의 높이에서는 세상의 끝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로 세상의 허영에 대한 우리의 어리석은 선호 때문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우화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밤에 시골로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위에는 마차의 좌석 양 옆으로 가스 랜턴이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 머리가 이 인공적 불빛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에는 우리 머리 위에 있는 하늘에서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혜로운 바람이 불어서 우리의 지상의 불빛을 꺼버리면, 우리의 어둠 속에 하나님의 하늘은 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불어오셔서 모든 경쟁하는 세상적 영광들을 제거해 버리시고 그의 거룩하심이 놀라운 영광 가운데 모든 겸손한 피조물에게 알려지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욥, 이사야, 찰스 콜슨, 그리고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였으며, 그의 위엄에 대한 갈망을 확대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이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여러분과 그 외 나머지 모든 분들께, 저는 항상 살아 계시고, 권위 있으시고, 전능하시고, 눈부시게 빛나시며, 숭배받으시며,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약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