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권징은 언제 합니까? 죄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성경 책 � 설�
Translation by Jina 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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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athan Leeman
About 교회 권징
한 교회에서 대다수의 권징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일상적인 관계의 과정 속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항상 서로를 견책해 주면서 돌아다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끔찍하겠죠. 제 말은 성도들이 거룩함에 대해 갈망하는 성격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성원들이 성장을 원하기 때문에 견책을 요청하고, 그것이 싫어서 숨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봐 라이언, 내가 인도했던 모임이 어땠는지 의견을 좀 들려 주겠어? 어떻게 했으면 좀 더 나았을까?”
“잭, 내 결혼 생활과 내가 아내에게 사랑을 베푸는 방법들에 대해 언제든지 의견을 들려주면 좋겠어. 그리고 내 육은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부모로서는 어떤지에 관해서도 좀 얘기해줄 수 있을까?”
책의 저자들은 때로 형식적 권징(Formative discipline)과와 견책적 권징(Corrective discipline)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형식적 권징은 설교를 의미합니다. 견책적 권징이란 잘못을 견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는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서로 분리되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교회 생활에서 형식과 견책으로서의 권징은 단지 일요일만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로 성격이 규정되어야 합니다. 권징은 제자도 과정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도와 권징은 언제 일어날까요? 일주일 내내 계속 되어야 합니다. 주일만이 아닙니다.
좀 더 어려운 문제
이제 좀 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권징의 과정에서 언제 다음 수준으로 넘어갈 것인가 입니다. 한 명에서 둘 또는 셋, 둘 또는 셋에서 전체 교회로 말입니다.
여기에 정해진 공식은 없습니다. 각 사건은 자체적인 가치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장로님들이 오랜 기간 동안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는 상황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우리가 몇 달간 혹은 심지어 몇 년 간을 특정한 이슈에 대해 다음 수준으로 갈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심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관련된 사람들이 죄와 싸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저희 교회에서는 장로회에서 한 부부에 대한 권징이 4~5년 동안 지속된 경우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부부를 상담했던 장로들이 임기가 만료되어서 장로회를 떠나게 되고 새로운 장로님들이 장로회에 들어와서 다시 상황을 보고받는 이런 과정이 이 커플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몇 차례 반복됐습니다. 부부는 모두 공개적으로 출교되지 않았습니다.
약간 쉬운 문제
적어도 신학적인 면에서 대답이 조금 더 쉬운 문제도 있지요. 어떤 죄에 대해 공개적인 노출과 출교를 집행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이전 세대의 저자들은 성경에서 고전 5~6장에 나온 죄의 목록들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만일 이 목록에 따른다면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출교하고 공금 횡령자는 그냥 두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사기꾼은 출교하되 살인자나 소아성애자는 그냥 두라는 걸까요? 공금 횡령자, 살인자와 소아성애자는 이 목록에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 목록 자체가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바울은 여기서 불신하고 회개하지 않는 상태의 사람들을 유형화하는 죄의 종류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6:9-10 참조).
그러므로 위 질문에 대한 짧은 답을 한다면, 밖으로 드러났고 중대하며 회개하지 않은 죄들은 공개적인 노출과 출교를 집행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해야 하며 한 가지나 두 가지만 포함해서는 안됩니다.
(i) 죄는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어야 한다
죄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죄여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조용하게 있는 상태의 죄를 의심한 것은 안됩니다. 바울은 위의 목록에서 탐욕을 지적했지만 탐욕에 대한 드러난 증거가 없는 사람을 탐욕적이라고 정죄하여 출교할 수는 없습니다. 세속 법정 시스템은 증거를 매우 신중하게 중시합니다. 교회들이 덜 신중해서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마녀사냥을 싫어하십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했지 “공적”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우상숭배는 공적이지 않습니다. 사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밖으로 드러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ii) 죄는 중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염려와 두려움과 스트레스도 일종의 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개적 노출이나 출교에 해당하는 죄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가 얘기를 좀 과장한 것을 제가 알아냈을 때 형제가 그걸 부정한다면 그것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공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건강한 교회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는 지체들에게서 발견하는 죄들의 많은 부분, 심지어 대부분을 눈감아 주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대한 죄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회개하기를 거절했을 경우 그 사람이 성령을 소유한 크리스천이라고 더 이상 생각하기 어려운 죄입니다. 교회의 멤버십이 무엇인지를 기억해 보세요. 한 개인의 신앙 고백에 대한 교회의 인정입니다. 중대한 죄란 우리를 보고 있는 세상 앞에 서서 신앙 고백을 믿을 만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게 만드는 죄입니다. 내 깨끗한 양심에 따라 어떤 얘기를 과장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내 깨끗한 양심으로는 성적 문란, 언어적 학대, 술취함 등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중대하다”는 기준이 약간 주관적입니까? 그렇습니다. 한 상황에서는 같은 죄가 출교 집행으로 이어지지만 다른 경우에는 여러 가지 상황적 요소로 인해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모든 인지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다루는 정확한 방법이 나와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요.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지혜와 믿음 속에 걸어갈 수 있도록 구하게 하십니다. 곁가지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장로들을 키워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 두명의 장로가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판단해서 교회에 이 문제를 상정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을테니까요.
(iii) 회개하지 않은 죄여야 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에 직면해 왔습니다. 그것이 죄라고 인정했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가 그것으로 그만두겠다고 말했는지의 여부를 불문하고 그는 결국 그것을 포기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되돌아갑니다. 바보처럼 어리석음 속에서 그 죄로부터 분리되지 못합니다(혹은 그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죄를 다루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분노하시며 탁자를 엎으신 상황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공개적으로 특정한 개인에게 날카로운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베드로와 마술사 시몬의 사도행전 8장, 고전 5장의 바울 등). 교회 멤버에 대한 견책이 심각도 9 또는 10 정도인 드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황은 대응이나 문제 제기의 방식이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 신중하라: 마태복음 18장은 진행 과정에서 될 수 있으면 범위를 작게 유지하라고 제언합니다.
- 온화하라: 바울은 ‘온유한 심령’으로 사람들을 바로잡으라고 말합니다(갈 6:1)
- 조심하라: 같은 구절에서 바울은 첨언하기를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ㅇ르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말합니다. 유다서에도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23절). 죄는 교활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할 때 조차도 쉽게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 자비하라: 유다서에는 두 번이나 말합니다. “긍휼히 여기라” 그리고 “긍휼히 여기라”(22절, 23절). 어조에 긍휼과 이해심이 묻어나야 하며, 마치 자신은 같은 죄에 전혀 넘어지지 않을 것처럼 자기 의를 내세우는 식은 안됩니다.
- 공정하라: 먼저 판단해서는 안되며 양 당사자의 이야기를 모두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딤전 5:21 참조)
- 명확하라: 소극적이거나 공격적이거나 또는 풍자적인 대응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태도이기 때문에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대신을 자신을 취약한 상황에 두더라도 명확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특히 죄를 지은 사람이 고백을 할 때 취약해질 상황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로는 온유함을 위해 절제된 표현을 쓸 경우 좀 더 솔직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확함을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공개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점점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적은 누룩이온 덩이에 퍼지게 됩니다(고전 5:6). 사람들이 경고를 받아야만 합니다.
- 과감하라: 관계적인 측면에서 권징의 최종 단계인 출교 또는 배척이 행해질 때는 교회 전체의 행동에 과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전 5:7), “이단에 속한 사람을 멀리하라”(디도서 3:10). 해당 개인은 더 이상 교회의 멤버가 아니며 성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견책을 할 때는 모든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항상 지혜가 필요합니다. ‘음,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선례들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이 많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인도 그리고 모든 상황의 특수성과 특이성에 대한 신중한 조사 등에 의지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