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복음의 승리

성경 책 � 설�

Related resources
More By John Piper
Author Index
More About Glorification (Resurrection of the Body)
Topic Index
About this resource
English: The Triumph of the Gospel in the New Heavens and the New Earth

© Desiring God

Share this
Our Mission
This resource is published by Gospel Translations, an online ministry that exists to make gospel-centered books and articles available for free in every nation and language.

Learn more (English).
How You Can Help
If you speak English well, you can volunteer with us as a translator.

Learn more (English).

By John Piper About Glorification (Resurrection of the Body)
Part of the series The Gospel Coalition 2007 National Conference

Translation by Desiring God

디어필드, 일리노이주

성경의 첫 장 첫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7절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31절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아름다움과 최고로 사모할 분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과 그들의 후손과 창조 세계 전체에 떨어지게 합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창세기 3:15은 이 저주가 창조 세계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 아니라는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영혼파괴자인 동시에 창조세계파괴자인 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바울 사도는 이 저주 가운데서 소망을 봅니다. 그리고 로마서 8:20-21에서 이 소망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목차

견딜 수 없는 고난의 광경

따라서 큰 그림으로 본 개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바대로는 모두 심히 좋았습니다. 아무런 흠도 없고, 고난도 없고,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악도 없었습니다. 그 때 아담과 하와가 엄청나게 악한 무언가를 그들의 마음 속에서 행했습니다. 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나무의 열매를 더 좋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죽음의 형벌을 선고하셨을 뿐만 아니라(창세기 2:17), 전 창조 세계가 바울이 말하는 바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고,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 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래는 고난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없었으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사람이 죽고, 모든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동물들이 고난을 당하고, 강이 갑자기 범람하여 마을을 휩쓸고, 눈사태가 스키타는 사람을 파묻고, 화산이 전 도시를 멸망시키고, 쓰나미로 하루밤 사이에 250,000명이 죽고, 태풍이 800명이 승선하고 있던 필리핀 여객선을 침몰시키고, AIDS와 말라리아와 암과 심장병이 수백만의 남녀노소를 죽게 하고, 강력한 토네이도가 중서부 타운 하나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가뭄과 기근이 수백만명을 기아선상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아주 기이한 사고가 일어나고, 친구의 아들이 양곡기 속으로 떨어져서 죽습니다. 어떤 이는 눈을 잃습니다. 그리고 어떤 아기는 얼굴이 없이 태어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있어서 그 순간 발생하는 세계의 고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무서움으로 인해 붕괴되어 버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광경을 견디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죄의 참상를 보여줌

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이유로 자연 질서가 그러한 허무함에 굴복하게 하셨나요? 자연 질서가 죄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 노릇"에 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 (창세기 3:17). 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나요? 왜 인간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응답으로 창조 세계에 자연 재해가 있게 된 걸까요? 왜 아담의 죄있는 자손들만 죽게 되지 않고 그런 일이 벌어졌나요? 왜 끔찍한 고난의 피비린내 나는 만화경이 매 세기마다 일어나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불쌍하게도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저의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연 세상을 저주 아래 두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주변에 있는 각종 질병이라든가 재해에서 목격하는 신체적 공포가 죄의 끔찍함에 대한 생생한 사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악은 인간의 도덕적 악이 말할 수 없게 끔찍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일종의 표지판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영적 세상의 무질서 때문에—즉, 죄 때문에— 자연 세상을 무질서 아래 처해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타락 상태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죄의 넘치는 악에 대하여 극도로 눈멀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얼마나 극악한가를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속의 어떠한 사람도 우리의 죄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악인지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풍조에 대하여 제대로 분개하고 역겨워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약간의 고통이라도 느껴지면, 하나님께 그에 대한 해명을 해달라고 요구하고 달려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은 무덤덤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새끼 손가락이라도 다치게 허락하시면, 우리의 모든 도덕적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는 자들인지 보여 줍니다.

육체적 고통의 나팔이 울릴 때

육체적 고통은, 무언가가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엄청나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팔을 불어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질병과 기형은 사탄의 자랑거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들은 영적 영역의 죄가 무엇과 같은지를 보여 주는 그림과 같습니다. 가장 경건한 사람들 중 몇몇도 그러한 기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형이나 질병이 죄에 대하여 그림처럼 보여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재앙은 죄가 받아 마땅한 형벌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심판의 날에는 이보다 천 배나 더한 것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고입니다.

오! 우리의 창조주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좋아하는 것, 예를 들면, 거실에 있는 양탄자에 쏟는 마음보다 더 적은 마음을 그에게 쏟고, 그를 무시하고, 신뢰하지 않고, 비하하는 것 같은 죄악들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얼마나 거슬리며,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 우리 모두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돌아서지 않을 것이며, 천국을 형벌 면제 외의 다른 어떤 이유로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형벌 면제를 위하여 천국을 원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깨어라! 죄는 이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우리의 병과 고통과 재앙 중에 우리에게 소리치십니다. 깨어라! 죄는 이와 같다! 죄는 이같은 것들로 인도한다. (요한계시록 9:20, 16:9, 11 등을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것은 이와 같다. 천국에서의 형벌 면제를 갈망하지만, 구속주를 갈망하지 않는 것은 이와 같다. 자연 세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꿈나라에서 우리를 깨우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공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911 테러의 4주년 기념일에 베들레헴 교회에서 이 진리를 설교하였습니다. 그 설교를 할 당시 우리 교회 안에도 끔찍한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후 두 주 내지 삼 주 정도 지난 후에, 저는 예배전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심한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의 젊은 엄마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의 아들의 장애가 끔찍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이 죄의 끔찍함을 느낄 수 있게 저를 도우소서." 형제들이여, 저는 목사—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보냄받은 떨리는 직무를 갖고 있는 자—인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다시 큰 그림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바대로는 모두 심히 좋았습니다. 아무런 흠도 없고, 고난도 없고,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악도 없었습니다. 그 때 아담과 하와가 엄청나게 악한 무언가를 그들의 마음 속에서 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죽음의 형벌을 선고하셨을 뿐만 아니라(창세기 2:17), 전 창조 세계가 바울이 말하는 바 "허무한 데", "썩어짐의 종 노릇"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피조물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 지상에서 6개월 짜리 아기 이상의 지적 능력을 결코 갖지 못할 지적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여기 그들에게 적합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눈물로 그리고 소망의 기쁨으로("슬퍼하나 항상 기뻐하는"), 로마서 8:18-25의 다음 구절들을 그들에게 읽어 줄 수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더 명확한 이해를 얻기 위해 더 중요한 몇몇 본문이 있습니다. 젊은 목회자들은 이를 참고하면 좋을 것입니다. 27년 전 제가 베들레헴 교회에 부임한 후 했던 초창기 설교들 중 하나로 "Christ and Cancer(그리스도와 암)" 라는 설교가 있습니다. 저는 제 회중이 질병과 고난에 관한 저의 신학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병문안 갈 때,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가는지 병상에 누워 있는 우리 성도들이 잘 이해하게 되기를 원하면서 위의 설교를 전했습니다. 저는 병문안 갈 때, "이 사람이 충분한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이 고쳐주실텐데" 등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그들이 23절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신음합니다. 이 전체 구절은 성경 중에서 우주적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동시에 목회적으로 매우 소중한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를 새 몸을 입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이 세대에서 이제 우리가 신음하고 있는 참으로 현실적인 그림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소망으로 우리를 지탱하여 줍니다. 우리는 그 소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네 개의 대지를 가지고 이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약속하시길, 피조물들이 그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과 썩어짐의 종 노릇 하는 데서 해방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21절: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자연 세계—물질적, 육체적 세계—는 저주에서 해방될 것이며, 허무함과 썩어짐에 종 노릇 하는 데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이 땅, 이 하늘은 해방될 것입니다. 이 땅은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66:22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요한계시록 21:1, 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도행전 3:19-21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로마서 8:21에서 바울은 옛 땅과 새 땅의 연속성에 대하여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새롭다"고 한 것은 "새롭게 되었다"라는 의미이지, "대체되었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새 차를 샀다고 할 때의 새롭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무언가가 해방되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사라졌다거나 버려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거기 있으며 이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장애 아동을 둔 어머니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의 아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이 땅에서는 한 평생 내내 전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 땅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 새 땅은 병이나 장애가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아들은 그 곳에서는 한 평생이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걷고 뛸 수 있을 것입니다.

2.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임

21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여기 나오는 순서는 의미심장합니다. 피조물은 타락한 인간을 뒤따라 썩어짐으로 들어갔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구속된 인간을 뒤따라 영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장애 아동의 부모 등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이는 정확하지 않은 잘못된 얘기입니다: "성경은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될 것이라고 하고 있지요? 그리고 당신의 몸이나 당신의 아들의 몸은 피조물의 일부이지요? 그러니 당신이나 당신의 아들은 이 영광스러운 해방을 경험할 것이고 새 부활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해방될 피조물의 일부이니까요." 왜 이 말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바라보는 관점과 다릅니다. 우리 몸이 새로운 질서에 따라 구속되리라는 것은 맞습니다.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하지만 우리 몸은 피조물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새로움을 입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가 먼저 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새롭고 영화된 몸으로 영화되고—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말씀하신 바처럼 되고(마태복음 13:43)— 그 후에야 이제 전 피조물은 영화된 자들이 그 안에서 살기에 적합한 장소로서 새롭게 단장됩니다.

따라서, 장애아동의 부모에게 "당신의 아이가 새로운 영화된 우주에 맞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새 우주가 당신의 영화된 아이에 맞게 변화될 것입니다" 라고 말해야 합당합니다. 21절의 핵심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공급하실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는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성도의 영광의 자유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의 자유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구속된 자들의 영광의 자유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 표현 또한 맞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다섯 절 앞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8:16-17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21절의 핵심은 새 하늘과 새 땅은 자녀들의 상속물이라는 것입니다. 우주는 그 자체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동장으로서—그리고 회당과 농장과 공예품 상점 등으로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위하여 그의 자녀들을 고안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그의 자녀들을 위해 고안하십니다. 태초부터 그러하며 마지막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러합니다. 만물은 그를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의 장애를 가진 자녀는 더이상 적응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몸은 완전히 구속될 것이고 새롭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적응될 것입니다.

3. 새롭고, 해방된 피조물의 도래는 탄생에 비유되며, 따라서 이 세상과의 연속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연속성도 있다.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sunōdivei, 역자주: 산고의 고통)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이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갑자기 말로 바뀌어 태어나지 않습니다. 즉, 연속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태어나기 전 아이와 태어난 후의 아이는 무언가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이 은유—새 땅의 도래와 아이의 탄생—의 뜻에 대하여, 새 땅과 옛 땅의 관계를 정확히 아이와 엄마의 관계로 보라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처럼 해석하면, 그 은유적 표현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 말씀에 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말씀은 불연속성이 있을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며, 과연 어떠한 불연속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른 본문들을 찾아보게 합니다. 물론 현 문맥에 의하면, 몸은 허무함과 썩어짐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하여 매우 명확한 구절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35절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제기합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그리고 37-51에서 이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불연속성]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단지 구속주로서 행하실 뿐 아니라 창조주로서 행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실은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왜냐하면, 선조들의 몸은 이미 분해되어서 그들의 몸을 구성하였던 원자들이 이미 수많은 다른 사람, 동물, 식물 등의 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거듭하여 바울은 말하길, 심어진 것이 있고 살아난 것이 있는데, 심어진 그것이 살아났다고 표현합니다. 즉, 연속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따라서 몸이라는 단어는 연속성을 의미하며 '육의' '영의' 등의 단어는 불연속성을 의미합니다] .....중략....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상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공존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참으로, 비밀입니다.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습니다(요한1서 3:2). 에수님이 말씀하시길,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2:30).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현 세상의 단순한 회복 혹은 개선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7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말씀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요한계시록 21:1).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23). "다시 밤이 없겠고" (요한계시록 22:5).

밤도 없고, 해도 없고, 달도 없고, 바다도 없고, 결혼하는 일도 없습니다. 불을 통해 되어진 세상 속에 영적 몸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연속성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21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의 부활체는 예수님의 부활체와 같은 형태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체는 어떠한 몸이었나요?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었고, 공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기이한 방식으로 오시고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놀랍고도 중요한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누가복음 24:39-43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은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따라서 이로부터 세 번째 핵심이 발견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 세상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을 줄을 압니다. 따라서 장애 아동의 부모가 "우리 아들은 어른으로 성장할까요? 그는 스스로 먹게 될까요? 그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게 될까요?" 등의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낭비되게 하도록 이 세상을 만들고 보존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아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아들의 가장 큰 기쁨과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을 위하여 그에게 어떤 수준의 발전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것은 비밀입니다. 우리는 유리를 통해서 희미하게 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비밀로 남겨져 있는 상태에서, 장애 아동의 부모 입장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아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일까요? 이는 마침내 네 번째 대지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4. 새 창조 안에서 구속된 몸을 가질 소망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받은 바 우리의 구원에 의하여 안전하게 확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최고의 소망은 아닙니다.

특히 로마서 8:23-24을 주목하십시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일종의 간접목적어로 보입니다(tē gar elpidi esōthēmen). 즉, 이 소망에 관하여,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는 말로 보입니다. 틀림없이, 이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을 때 이 소망이 안전하게 확보되었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린도전서 15:1-3)는 복음을 의지함으로써 구원받기 때문에, 이 소망은 복음에 의하여 안전하게 확보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승리하고, 우리를 이 소망으로 데려갑니다(로마서 6:5, 8:11).

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구속된 몸을 입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단단한 반석과 같은 확신입니다. 우리 대신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죄의 용서를 공급하고, 우리의 의를 공급하였습니다. 그리고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려움과 죄책에 직면하여 단단한 반석을 찾고 있는 이 부모들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복음의 궁극적인 선물: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

하지만 복음의 궁극적 선물은 새 하늘과 새 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복음의 궁극적 선은 구속된 몸도 아닙니다. 복음의 궁극적 선은 용서도 아니고, 구속도 아니고, 화해(propitiation, 진노를 달램)도 아니고 칭의도 아닙니다. 이들은 다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복음을 참으로 좋은 소식으로 만드는 복음의 궁극적 선, 이것이 없으면 다른 모든 선물들은 좋은 소식이 될 수 없는 복음의 궁극적 선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특히 십자가에 못박히고 다시 살아나신 아들의 영광 안에서 보는 하나님, 그의 무한한 아름다움 때문에 즐거움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그의 무한한 가치 때문에 최고의 보물로 소중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반영하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복음의 궁극적 선입니다.

복음: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한 계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궁극적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결코 그의 인간의 몸을 벗지 아니하고 이를 갈보리의 영원한 엠블럼으로 보유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물질적 우주는 일단 창조되었고, 그 후 새로운 형태로 변화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성육신하시고, 육체 가운데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신인으로서 다스리시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게 반영되는 방식으로 노래하고 말하고 일하고 놀고 사랑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구속된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이는 것을 위해서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충만하게 볼 수 있게 반사할 것입니다.